[스크랩] 월간 마음수련 9월호 발췌_정통 침뜸의 대가 구당 김남수 선생
마음으로 만난 사람 | 정통 침뜸의 대가 구당 김남수 선생
(월간 마음수련 9월호)
제가 아니라 우리 침뜸과 자신의 몸에 감사하세요
정통 침뜸의 대가 구당灸堂 김남수 선생
구당 김남수 선생을 만나기 위해 서울 청량리 ‘남수침술원’을 찾았다. 휴업, 문은 닫혀 있었다. 직원의 안내로 위층 사무실로 들어섰다. 직원들은 차분히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심정까지 숨길 수는 없는 듯 착잡한 분위기는 그대로 전해졌다. 구당 김남수 선생은 서울시를 상대로 침사자격 정지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한 상태다. 선생의 나이 95세. ‘뜸집(구당灸堂)’이라는 호가 말해주듯 그는 평생 침뜸을 놓으며 살아왔다.
그 긴 세월 그가 치료한 병명은 헤아릴 수 없고 치료받은 환자 또한 셀 수 없다. 그렇게 평생을 헌신했으며 침뜸의 대가라 불리던 그가 오늘날 의료법 위반자가 된 것이다. 누구보다 참담한 심정일 것이라 생각됐다. 그러나 선생은 이내 소박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섰고 온화함으로 선생이 평생 바쳐온 침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글 이권자, 사진 김혜균
구당 선생의 침사자격 정지처분 취소 청구 소송은…
지난해 가을, 방송에 출연하며 침뜸의 효험을 알리던 구당에 반발해, 개원한의사협회에서는 구당 선생이 뜸 자격 없이 침 자격만으로 불법 뜸 시술을 했다며 고소했고, 구당은 45일간의 영업정지와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구당 선생 측은 “의료법에서 구사와 침사를 구별한 이유는 뜸 시술만 허가받은 구사의 침술 행위를 금지하려는 것이지, 침사에게 위험성이 없는 뜸 시술을 못 하게 하려는 취지가 아닌데 뜸 시술을 했다는 이유로 침사 자격을 정지시킨 것은 법의 취지를 오해한 것”이며, “당시엔 침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은 통념상 특별한 자격 없이도 뜸 시술을 병행하는 게 당연시됐었고, 이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며 취소 청구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 구당은 침술원 문을 닫았다. 그의 임상경험으로는 침과 뜸은 ‘하나’로 통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인류 최초 침뜸의 발상지
“허허. 마음, 그 부분은 제일 어려운 건데….” 선생은 <마음수련> 제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우리 동양의학에서는 마음이 ‘임금’이라고 제일 어른이라고 그래요.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이 우주를 주관하는 게 마음이에요. 자연이라고. 자연은 그냥 ‘저절로’인 거잖아요. 새들이 집을 지을 때 그걸 누가 가르쳐줬나요? 우리 동양의학도 그래요. 옛날 사람들이 다 해놓은 거야.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도통이라는 게 있었던 게 아닐까. 허허.” 침뜸은 인류 최초의 의학이라고 했다. 열이 나면 손으로 짚고 가려우면 긁듯이, 인간이 ‘자연히’ 알게 된 것이라는 것. 아픈 부분을 만지거나 주무르면 통증이 줄어듦을 안 원시인들은 나무로 찔러보고, 돌을 갈아 문질러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다 철기시대에 이르러 쇠를 쓰면서 좋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침이라는 건 금속이 아니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 몸 안에는 전기가 흐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불을 켜려면 전깃줄이 있어야 되듯이, 우리 몸 안에도 그런 줄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같은 혈액이에요. 그 피를 만들어주는 게 바로 뜸이고, 전기가 잘 통하게 해주는 게 바로 침이에요.”
우리의 인체는 음과 양으로 되어 있으며, 이 음양의 균형이 깨진 것을 병이라 일컫는다 했다. 병을 고친다는 건 이 음양의 조화를 맞추는 것. 즉 우리 몸 안의 에너지가 다니는 통로를 경락(經絡)이라 부르고, 경락의 기가 모이고 출입하는 곳을 경혈(經穴)이라 하는데, 그곳에 침을 놓고 뜸을 떠서 기운이 잘 돌아가고 저절로 균형을 잡게 한다. 우리 몸이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연치유법인 것이다.
그 놀라운 침뜸의 발상지 또한 우리나라라 한다. 중국의 고전 의서(醫書) <황제내경>에도 ‘침이 동방에서 왔다’고 쓰여 있으며, 1923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발견된 ‘폄석(貶石돌침)’은 구석기 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침을 사용했다는 증거. 또한 쑥뜸은 추운 북쪽 지방에서 유래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만주 일대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을 칭한다. 음양의 조화와 침뜸의 효과, 경혈의 자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선생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신선이 내려와 우리 선조들에게 가르쳐주고 간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옛날에 글 아는 분들은 대부분 교양으로 침뜸을 공부했어요. 식솔들의 가벼운 병 정도는 치료해줄 수 있어야 진정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깊은 병에는 물론 의원을 찾아야 했다. 뛰어난 의원이 있다는 건 마을의 큰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김남수 선생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의원이었다. 호남 지역에서 소문난 명의였던 그의 아버지는 환자가 있는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하지만 치료비를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한다.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는 법
“아버지는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는 법이라고 하셨어요. 침은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침으로 돈 벌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지요.” 대신 추수 때가 되면 마을 이장이 빈 자루를 들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러면 형편껏 성의를 다하면 그뿐이었다.
일년 내내 치료를 받은 중풍환자나 침 한 번에 귓병이 똑 떨어진 이나 경중도 따지지 않았다. 선생은 그것이 우리만의 아름다운 의료보험이었다고 전한다. 뿐인가, 의약분업도 확실했던 시절이었다.
“옛날엔 의원이 진맥을 해서 병을 알아내고 침과 뜸으로 치료를 한 뒤, 처방전을 써주면 환자는 약방에 찾아가 지어 먹었지요. 아버지는 특히 의원은 약을 주지 않으며 다만 약을 일러줄 뿐이라는 원칙을 가진 분이셨어요. 약에 대해서도 잘 아셨지만 ‘약 만들어줄 시간 있으면 환자를 더 봐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선생이 처음 침을 잡은 건 열한 살 때였다. 특별히 가업을 잇겠다는 생각도 없이 구당은 형님과 함께 아버지에게 배웠다. 아버지의 교육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이었다고 회고한다. 하나하나 보고 듣고 만져서 익히는, 학(學)과 술(術)이 일치하는 과정이었던 것. 처음엔 집으로 찾아온 어르신들께 뜸을 떠드리는 것부터 했다.
“어르신들이 오셔서 ‘아유, 내가 죽을 것 같애’ 한단 말이에요. 근데 한 며칠 뜸을 떠드리면 ‘아, 됐다고, 좋아졌다’고 그래요. 그러면 나도 좋았지. 그러다 보니 아, 나는 사람들을 건강하게 해줘야겠다, 그런 마음을 먹은 거 같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명성은 형님에게로 이어졌다. 1943년 그도 ‘남수침술원’을 정식 개업하고 본격적으로 의술을 펼쳤다. 이쯤이면 요즘 말 많은 자격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는 스승한테 다 배웠잖아요. 그걸 ‘사승제(師承制)’라고 합니다. 스승이 인정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저 사람은 잘 고친다고 소문이 나면 군수가 도지사한테 추천을 해요. 그럼 도지사가 ‘이분에게 의원 자격을 줘라’ 하는 거야. 우리 때는 일제치하였기 때문에 나는 총독부에서 침술원을 해도 좋다는 자격을 주었어요. 그게 면허였지.”
고쳐준 사람보다 못 고친 사람 마음에 남아요
구당은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찾았다. 병원 응급실이 없던 시절이라, 한밤중이라도 환자가 있다고 하면 가리지 않았다.
‘환자가 있는 곳은 어디든 간다.’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는 법이다.’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의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발목을 삔 사람부터 빈혈, 불임을 고쳐주고, 디스크와 당뇨, 심장, 중풍 환자도 호전되게 해주었다. 구당은 뜸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는 환자, 멀어서 자주 올 수 없는 환자에게는 집에서도 할 수 있도록 뜸자리와 뜸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뜸집’이라는 호도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의원으로서 그가 가장 괴로울 때는 환자들이 완쾌되지 못하는 걸 볼 때였다. “내 목적이 아픈 사람 고통을 덜어주는 거니, 나은 사람보다야 못 고쳐준 사람이 항상 마음에 남지요.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병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 중에는 저명인사도 꽤 많았다.
선거운동 하느라 악수를 많이 해서 어깨를 들 수 없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선생의 침뜸 한 번에 통증이 사라졌다며 신기해했다. 수많은 국회의원, 장관, 학자, 기업가들, 소설가 조정래씨와 시인 김지하씨, 최근엔 영화배우 장진영씨의 암 치료를 해주며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침뜸의 대가’ 구당 김남수 선생. 하지만 그에게는 침구사로서 평생 짊어져온 또 다른 짐이 있었으니, 1962년에 사라진 침구사 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의 민속신앙은 ‘미신’, 전통의학은 ‘비과학’적이라 핍박했으며 그 하나로 침구사 제도를 폐지했다. 그것은 침구사 교육과 면허 취득의 통로가 차단됨을 의미했다. 당시 11개나 되던 침구학원은 폐쇄됐고 5,000여 명의 졸업생들은 갈 길을 잃었다. 재야 침구사들은 침뜸으로 사람을 살려내고도 감옥에 가야 하는 일들이 생겼다.
그는 침구사 제도 부활을 위해 안 가본 데가 없이 백방으로 노력을 해왔다 한다. 동료들과 함께 궐기대회도 가져봤고, 단식투쟁도 해보고, 혈서도 썼다. 헌법소원도 냈고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민원도 넣었다. 6대부터 15대 국회까지 제출한 해명서와 진정서 등은 캐비닛을 차고 넘칠 정도이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번번이 관철되지 않았다.
입법을 맡은 국회의원들은 의사와 한의사 단체의 반대가 워낙 커서 어렵겠다고만 했다. 구당은 침구사들이 의사와 약사, 양의사와 한의사가 벌여오던 분쟁의 소용돌이에 들어섰음을 처절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국민의 건강을 생각해야 하는 의료인들이 소위 ‘밥그릇 싸움이나 한다’는 질타를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생명을 가지고 이익 싸움을 해서는 안 되잖아요. 아무리 물질사회가 되었어도 의학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거니까.” 한의사들은 한의사가 있으니 이제 별도의 침구사 제도는 필요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많은 이들이 ‘한의사가 있는데 침구사가 따로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선생은 ‘물론 있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아직 우리나라 한의대의 교육은 탕약술 위주이기 때문이다. 한방이 적절히 배합한 약초가 체내에 들어가 효과를 일으키는 화학요법인 반면, 침구술은 침과 뜸으로 인체를 자극하는 물리적 요법인 만큼 한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독립적인 영역을 가진 의술이라는 것. 그래서 옛사람들도 첩약과 침구를 분리시켰다.
구당의 바람은 침구 제도를 부활시키고, 배우고 시술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을 낮추자는 것이다. 양의사도 배우고 한의사도 배워서, 각자 전문 분야에서 활용하고, 침구사가 되고자 하는 일반인도 배워서 전통침구에만 집중하는 전문가들이 많아지면 더없이 좋지 않겠는가. 허면, 몸이 아파도 병원비와 약값부터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과, 가까운 곳에 병원이 없어 노심초사하는 시골 오지의 국민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
이미 일본은 한 해에 5,000여 명에 이르는 침구사를 길러내고 있고, 중국은 중서의(中西醫)제도를 통해 침구술에 관심이 있는 양의에게 교육 기회를 주고 있다. 서구 여러 나라조차 일찍이 침뜸의 가치를 깨닫고 침구사 배출과 침구학 연구에 힘을 쏟고 있으며, 국제보건기구에서도 침뜸을 활용하라고 회원국에 권한 지 오래다.
허나, 우리나라는 해방 후 정식 침구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하루빨리 우리나라도 한의과대학 안에 침구과를 신설하여 침구술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침구전문학교 제도가 공존하는 것도 좋겠다는 게 구당의 생각이다. 세월이 흐르고 함께 침구사 제도 부활 운동을 하던 동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이대로 침뜸이 끊기는 게 아닌가 근심하던 구당은, 자신이 아는 것만이라도 가르쳐서 맥을 잇겠다 마음먹는다. 이미 알음알음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구당은 1993년 <세계침구의학임상연구원>이라는 일종의 민간교육연구기관을 발족한다. 2000년부터는 ‘정통침뜸교육원’을 만들어 ‘뜸요법사’를 배출해냈다. 민간 자격증 ‘뜸요법사’가 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쉽지만도 않은 것 같다. 300시간의 교육을 수료하고 평가시험에 합격한 뒤, 180시간의 자원봉사를 필수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에게 침뜸을 배운 이들이 4,000여 명. 그의 뜻을 잘 아는 회원들 대부분은 ‘뜸사랑봉사단’으로서 전국 각지를 다니며 ‘배워서 남 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배워서 남 주자”, 지금도 전국 각지 봉사활동
‘배워서 남 주자’는 구당이 만든 구호. 그들은 낙도, 산골오지, 무의촌과 산업현장 근로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국회, KBS, 복지관 등 각 관공서나 기관의 요청으로 세워진 ‘침뜸봉사실’도 전국에 30여 곳. 국내뿐 아니라 몽골, 인도, 베트남, 캄보디아, 아프리카 잠비아, 미국 등지에서 초청을 받아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한의사협회에서는 봉사활동 역시 의사 면허가 없는 이들이 의료 활동을 하는 것이므로 불법이라고 고발을 한다. 구당이 직접 경찰서에 가 조사를 받은 것만 30여 차례, 모두 무혐의 처리였다. 순수한 자원봉사이며, 노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선생은 ‘뜸사랑봉사단’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이미 봉사를 해오고 있었다. “봉사는 늘 생각해오던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여행을 하다가 시골 노인들이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는 걸 보고는 결심했었지요.”
구당이 본격적으로 봉사에 나선 건 1984년, 그의 나이 70세 때였다. 선생은 생계를 위한 침술원 운영은 일주일에 이틀, 혹은 하루만 하고 남은 날은 일요일도 없이 봉사활동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난 환자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으면 꼭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아니라, 우리 침뜸과 자신의 몸에 감사하세요.” 우리 몸의 오장육부(五臟六腑)는 영양분도 만들고 혈액도 만들고, 병을 이길 수 있는 각종 약품을 생산하는 공장이기도 하다는 구당 선생. 그렇게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자신의 몸과 그 치료를 도와주는 침뜸에 감사하라는 뜻이다.
선생은 자신이 용한 게 아니라, 침과 뜸이 용하다고 늘 말한다. 침과 뜸은 제대로 수련만 해서 익히면 누구나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나서 두 가지를 세상에 내놓고 갈까 합니다. 하나는 ‘무극보양뜸’이고 또 하나는 ‘화상치료침’입니다.”
무극보양(無極保養)뜸은 구당 뜸 치료의 핵심. 그는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인체의 경혈(經穴)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조화로운 자리를 조합한 8개 경혈 12자리(여성은 13자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그곳에 매일 뜸뜨기를 하면 몸의 원기가 북돋고 저항력이 길러져 병이 저절로 치료되고 예방된다는 것. 하지만 사람들이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을 때면 “너무 쉬워서, 너무 비용이 들지 않아서, 오히려 신뢰하지 못하는가” 싶어 허탈해진단다. 또 하나는 화상침이다. 1986년 1월이었다. 그의 아내가 펄펄 끓는 물을 엎으며 얼굴과 가슴에 심한 화상을 입자 그는 침으로 아내의 화상을 치료했다.
구당은 전부터 화상에도 침이 효과가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침은 진물과 고름이 나는 부스럼이나 살갗이 헌 데에 잘 들었으며, 또한 감기나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고열에 뛰어난 효험을 보였던 것이다.
역시나 아내의 화상은 열흘이 채 되기도 전에 흉터 하나 없이 깨끗이 나았다. 이후 친손자를 비롯해, 곰국에 화상을 입은 아주머니, 가스 불에 얼굴을 덴 가스배관공, 고압선에 화상을 입은 전기공 등 많은 화상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약 4년 동안 그 사례를 꾸준히 기록하고 촬영한 뒤 우리나라 의사들에게도 보여주고, 1994년에는 세계 침구학회연합회 국제침구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를 했다. 하지만 이 탁월한 화상치료법에 대해서도 해외와 달리 국내 의료계의 반응은 조용할 뿐이다.
화상의 고통 속에서도 남편의 침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던 아내, 봉사활동 가는 남편을 돕기 위해 예순의 나이에 운전면허를 딴 아내, 생계보다는 침구사 제도 부활 운동과 봉사에 더 앞장선 남편 때문에 고생이 말이 아니었던 그의 아내는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다.
최근 들어 구당의 미국행이 잦아지고 있다. 미국 의과대학과 병원들의 요청으로 공개세미나와 무료 진료가 빈번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당의 임상경험과 실력에 감탄한 미국은 선생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이고 있다. 자격과 면허를 주겠다, 영주권을 주겠다, 집도 장만해주겠다며 미국생활의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의 ‘구당 모셔가기’, 구당의과대학 설립 중
L.A의 사우스베일로(South Baylo) 한의대학에서는 그에게 동양의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애틀란타에는 ‘구당통합의과대학’이 설립되고 있다. 그곳에서는 의사, 한의사, 침구사들에게 침뜸과 임상을 교육하여 미국 전역에서 통합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자격자를 배출할 예정이라 한다.
“깜짝 놀랐지요. ‘구당’은 내 호잖아요. 그런 좋은 학교 이름에 왜 개인 이름을 붙이냐고 그랬더니, ‘하버드’도 사람 이름입니다, 그러잖아요. 허허.” 그러는 사이, 우리나라는 오히려 구당에게 영업정지를 내린 것이다. 구당은 한국에서 못 하게 하니 침뜸을 시술하고 연구하려면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다.
“어느 나라면 어떤가, 아픈 사람 치료해주면 되지, 그런 생각도 듭니다.” 선생의 말끝은 씁쓸했다. 하지만 경락과 경혈이 모든 사람에게 있듯이 건강과 병은 모든 인류 앞에 공평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때문에 동서양의 의학은 더욱 융화되어야 한다는 것. 구당의 말처럼 양의사와 한의사, 침구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며 환자의 치료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기란 멀기만 한 걸까.
구당은 한때 우리나라의 전통 침뜸이 사라질까봐 두려웠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한다.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며, 인종의 차별도 없고, 빈부의 차별도 없고, 장소의 차별도 없는 침뜸은 ‘사람이 아플 것을 염려’하여 하늘이 준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침뜸이 인류가 시작되면서 함께했듯이 그 끝도 함께하리라 믿는다. “저는 마음의 힘을 믿습니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을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곧 우리 국민을 위한 침구사 제도가 빛을 볼 거라 믿습니다.”
‘대가’라는 호칭은 한 가지 일을 오래한다고 해서 듣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배워서 남 주자.’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도리와 의료인이라면 꼭 간직해야 할 소명을 이렇듯 쉽고 명료하게 말하기가 쉬운가. ‘환자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침뜸의 대가’ 구당 선생의 마음은 이미 하늘에 닿은 듯하다.
월간 마음수련 9월호에 나오신 김남수 선생님
예전에 추석때 kbs에 특집 방송으로 나오신걸 본적이 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인것 같다..